세부 주제: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황민화 정책과 문인·언론인·교육자·종교계 지도층의 전쟁 협력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강점기의 분위기는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1920년대의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에는 조선인 사회의 유력층을 회유하고 식민 통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 중요했다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인 전체를 전쟁 수행에 동원하려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내선일체’다. 여기서 ‘내’는 일본 본토, ‘선’은 조선을 뜻한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하나라는 뜻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려는 동화 정책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부터 친일 협력의 성격도 더욱 분명해졌다.
단순히 일본의 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벗어나, 유명한 문인과 지식인, 교육자, 종교계 인사들이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조선 청년에게 군 입대를 권하거나 전쟁 물자 헌납을 독려하는 사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7년은 왜 중요한 전환점이었을까
1937년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에는 더 많은 병력과 물자, 자금이 필요해졌다. 조선 역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전쟁 동원에서 빠질 수 없었다.
일제는 조선을 단순한 식민 통치 대상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의 공급처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정책도 달라졌다.
이전에는 조선인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조선인이 일본 제국의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졌다.
이때 내선일체라는 구호가 강하게 등장했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하나다.”
표면만 보면 차별을 없애겠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정책의 방향은 조선인의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과 언어, 문화를 약화시키고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편입시키는 데 가까웠다.
결국 ‘같아진다’는 말은 동등한 권리를 주겠다는 의미라기보다 일본인이 되는 방향으로 조선인을 변화시키겠다는 의미로 작동했다.
황민화는 사람들의 일상까지 바꾸려 했다
내선일체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황민화’다.
황민은 일본 천황의 신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황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와 언론, 사회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더욱 강조되었고 학생들에게 일본 제국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교육이 강화되었다.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도록 하는 정책도 시행되었다.
신사참배 역시 중요한 문제였다.
신사는 일본의 국가 신도와 관련된 공간이었다. 일제는 학교와 여러 단체에 신사참배를 요구했고, 종교계에서도 이를 둘러싸고 큰 갈등이 발생했다.
특히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신사참배를 종교적 신념과 충돌하는 문제로 보아 반대했다.
반대로 일부 종교 지도자와 단체는 일제의 압력에 순응하거나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제 말기의 친일 문제는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교육과 문학, 종교, 언론 등 사회 전체의 지도층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중요한 역사적 쟁점이 되었다.
이광수는 왜 대표적인 ‘변절 지식인’으로 거론될까
이광수는 일제강점기의 친일 문제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 이유는 그의 초기와 후기 행적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 2·8독립선언과 관련된 활동을 한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노선은 달라졌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일본의 황민화와 전쟁 동원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글과 활동을 남겼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 제국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했고 전쟁 시기에는 조선 청년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광수의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작가가 친일했다는 데 있지 않다.
글을 쓰는 지식인은 대중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이 길이 민족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식의 논리를 제시하면 식민지 권력의 선전 효과는 훨씬 커질 수 있다.
즉 문인의 친일 협력은 개인적 의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론 형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최남선의 행적은 왜 더 복잡하게 기억될까
최남선 역시 초기 독립운동 경력과 후기 친일 협력이 동시에 언급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초기 경력만 보면 민족운동사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등에 참여했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쟁 수행에 협력하는 행적을 남겼다.
이런 변화는 역사적으로 강한 논쟁을 남겼다.
독립을 선언하는 글을 작성한 사람이 이후 식민지 권력의 사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한 인물을 한 단어로만 정리하지 않는 것이다.
최남선의 초기 민족운동 활동은 역사적 사실이다.
동시에 이후의 친일 협력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한쪽을 지우고 다른 한쪽만 강조하면 인물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는 것이 이 시기의 친일 문제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문인과 언론인이 전쟁 선전에 동원된 이유
전쟁 시기의 친일 협력에서 문인과 언론인은 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전쟁에는 군인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도록 설득할 논리와 분위기도 필요하다.
일제는 신문과 잡지, 강연회와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다.
유명한 문인이 일본의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 독자는 그것을 단순한 정부 발표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언론인이 조선 청년에게 지원병이 되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강조하면 군사 동원의 심리적 장벽을 낮추는 효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전쟁 선전에 참여한 지식인의 책임은 단순히 “글 몇 편을 썼다”는 수준으로 보기 어렵다.
그 글이 어떤 정책과 연결되었는지, 누구에게 어떤 행동을 권했는지가 중요하다.
친일 행적을 평가할 때 ‘발언의 영향력’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원병과 징병은 어떻게 달랐을까
일제는 처음부터 조선인을 동일한 방식으로 군대에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
1938년에는 조선인 지원병 제도가 시행되었다.
명칭은 ‘지원’이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와 행정적 압박 등을 고려하면 실제 참여 과정은 단순한 개인 선택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이후 전쟁이 확대되면서 동원은 더 강해졌다.
1944년부터는 조선인에게도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지원병 시기에 일제는 유명 인사와 사회 지도층을 선전에 활용했다.
조선 청년이 일본군에 들어가는 것을 ‘황국신민의 의무’ 또는 ‘명예’로 포장하려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친일 지식인과 언론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행정기관이 직접 명령하는 것보다 조선인 유명 인사가 같은 조선인에게 전쟁 참여를 권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씨개명은 왜 단순한 이름 변경이 아니었을까
1939년 일제는 조선인의 성명 제도를 일본식으로 바꾸는 방향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겉으로는 새로운 ‘씨’를 만들고 이름을 변경하는 제도였지만, 실제로는 황민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선인의 성과 본관은 가족과 혈연, 사회적 정체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이름 체계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 편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정체성까지 일본 제국의 방식으로 재편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창씨개명 문제 역시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법적인 형식과 실제 사회적 압력에는 차이가 있었고, 사람들의 대응도 다양했다.
적극적으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며 식민지 체제에 순응한 사람이 있었고, 가능한 범위에서 기존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조선인의 이름까지 통치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계 지도층도 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종교계 역시 큰 압력을 받았다.
일제는 신사참배와 전쟁 지원을 요구했다.
일부 종교 지도자와 단체는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탄압을 받기도 했다.
반대로 일부 지도층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거나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지하는 선언과 행사에 참여했다.
종교 지도자의 선택이 중요했던 이유는 신도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종교인이 전쟁 지원을 정당화하면 신도들에게도 상당한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제 말기의 친일 문제는 한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와 행정뿐 아니라 문학, 언론, 교육, 종교, 경제까지 식민지 권력과 협력의 문제가 확산되었다.
전쟁 협력은 왜 이전의 ‘현실 타협’과 구분해서 봐야 할까
1920년대 일부 지식인은 “당장 독립이 어렵다면 우선 교육과 경제를 발전시키자”는 현실론을 이야기했다.
이런 주장 역시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의 전쟁 협력은 한 단계 더 나아간 문제였다.
일본의 침략전쟁 자체를 정당화하고 다른 조선인에게 일본군 입대나 전쟁 물자 제공을 권하는 것은 단순한 소극적 적응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정치 문제를 피한 작가와 일본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찬양한 작가를 같은 방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운 학생과 학생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권한 교육자도 동일하지 않다.
역사에서 친일 협력을 다룰 때 바로 이런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존을 위한 제한적 순응, 공직 수행, 식민 통치 선전, 독립운동 탄압, 침략전쟁 동원은 책임의 정도와 성격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끝까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 말기의 강압이 매우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지도층과 지식인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해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을 계속했고 1940년에는 한국광복군도 창설되었다.
국내에서도 공개적인 독립운동이 극도로 어려운 가운데 일제의 요구에 끝까지 협력하지 않거나 활동을 중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종교적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친일 협력을 “당시에는 누구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시의 강압을 무시한 채 모든 행동을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결국 역사적 평가는 당시의 압력과 개인의 선택, 지위와 영향력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해방 뒤 이들의 경력은 왜 큰 논쟁이 되었을까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식민지배가 끝났지만,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사회적 인맥과 전문 경력까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고위 관료와 경찰, 지식인 등 일부가 다시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친일 협력 인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는 해방 직후부터 큰 정치적 문제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가 활동했지만 정치적 충돌과 방해 속에서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친일 협력자에 대한 책임 문제가 충분히 정리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후 계속 제기되었다.
오늘날까지 친일 문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도 이 지점과 관련이 있다.
문제의 핵심이 단순히 “일제강점기에 누가 잘못했는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의 권력과 경력이 해방 이후 어떤 방식으로 이어졌는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마무리
1937년 이후의 친일 협력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인은 식민지 주민을 넘어 전쟁을 수행할 인력과 물자의 공급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일제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강조했고, 신사참배와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지원병과 징병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 제국 안으로 더욱 강하게 편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문인과 언론인, 교육자, 종교계 지도자는 단순히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것을 넘어 일본의 전쟁을 대중에게 선전하고 동원을 독려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특히 이광수와 최남선처럼 과거에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는 인물의 변화는 친일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은 한 시대의 지도층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지식과 명성이 식민 권력을 위해 사용될 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이 흐름을 해방 직후까지 연결해 1945년 이후 친일 경찰·관료·군 경력자 일부가 왜 새 국가의 행정과 치안 체제에 다시 등장했는지, 반민특위는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이 문제가 대한민국 초기 정치와 권력 구조에 어떤 논쟁을 남겼는지 살펴볼 수 있다.
FAQ
Q1. 내선일체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문자 그대로는 일본 본토와 조선이 하나라는 의미지만, 실제 식민 통치에서는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적 구호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에서 강하게 강조되었습니다.
Q2. 이광수와 최남선은 처음부터 친일 인물이었나요?
두 사람 모두 초기에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활동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와 전쟁 동원에 협력한 행적이 나타났기 때문에 ‘변절’ 문제를 다룰 때 자주 언급됩니다. 초기와 후기의 활동을 각각 구분해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Q3. 일제 말기 친일 협력은 어떤 행위를 중심으로 판단할 수 있나요?
식민지배나 침략전쟁을 공개적으로 찬양·선전했는지, 군 입대나 전쟁 물자 제공을 독려했는지, 독립운동 탄압에 적극 참여했는지, 식민 통치기관의 고위직에서 정책에 관여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일본어를 사용했거나 일본 기관에 근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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