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 주제: 대한제국 말기 친일 세력의 형성과 일본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이들이 맡았던 역할
한국 근현대사를 읽다 보면 ‘친일파’라는 표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오늘날에도 친일 문제는 역사와 정치, 사회적 기억을 둘러싼 논쟁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친일 세력은 어느 시점부터 뚜렷한 정치 세력으로 나타났을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개항 직후 일본의 근대화 경험을 배우자고 주장했던 사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병합 과정에 협력한 사람을 모두 같은 의미로 묶어서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친일’을 살펴볼 때에는 단순히 일본과 접촉했는지를 보는 것보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의 정책에 협력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준으로 보면 친일 세력이 정치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기는 대한제국의 국권이 급격하게 약화된 1900년대 중반,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개화파와 친일 세력은 같은 의미일까
조선 말기의 역사를 읽을 때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개화’와 ‘친일’을 같은 의미로 보는 오류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일부 지식인과 관료들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빠르게 제도를 개편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통해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접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일본의 제도를 참고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곧바로 친일파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후 일본이 단순한 외교 상대국을 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직접 침해하기 시작하면서 생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자 사람들의 선택도 갈라졌다. 일본의 간섭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었던 반면, 일본의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일본의 지배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따라서 친일 세력의 형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본 문물을 받아들였는가’보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을사늑약과 함께 드러난 친일 관료
1905년 을사늑약은 친일 문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압력을 가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는 내용을 담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한제국의 대신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은 후대에 이른바 ‘을사오적’으로 불렸다.
이 명칭은 이들이 일본의 강압 아래 진행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에 책임이 있다고 본 데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에도 이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이 매우 강했다는 사실이다.
즉 ‘친일파’라는 평가는 해방 이후 갑자기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을사늑약 직후부터 언론과 지식인, 유생과 일반 민중 사이에서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나타났다.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친일 문제를 볼 때에는 후대의 평가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그 행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도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다.
친일 세력은 관료에게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친일 세력이라고 하면 흔히 몇몇 고위 관료만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대한제국 말기에는 정치 조직과 사회단체를 통해 일본의 정책에 협력한 세력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단체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일진회다.
일진회는 1904년 조직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 정책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활동했다. 특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일본 측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고, 결국에는 한국과 일본의 병합을 주장하는 움직임에도 참여했다.
1909년에는 일진회가 한일병합을 요구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친일 협력이 개인 몇 명의 선택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일부 정치인과 관료뿐 아니라 조직과 사회단체도 활용했다. 식민지 지배를 추진하려면 군사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정을 운영하고 지역사회를 파악하며 일본의 정책을 전달할 현지 협력 세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구조는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더욱 확대된다.
왜 일부 사람들은 일본에 협력했을까
친일 협력의 이유를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을 따라가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나 재산을 유지하려 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나 금전, 관직과 같은 구체적인 대가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또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서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과의 결합을 주장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개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역사적 평가는 그 행동이 가져온 결과와 함께 이루어진다.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거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제도적으로 도운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선택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료를 읽을 때에도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단순히 일본 학교에서 공부했다는 사실과 한일병합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행동은 성격이 다르다. 일본 기업과 거래했다는 사실과 식민지 통치기관에서 독립운동 탄압에 참여한 행위 역시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친일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물의 이름보다 먼저 무엇을 했는가를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일본은 협력자들에게 어떤 대가를 제공했을까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일부 인사들에게 작위와 은사금 등이 주어졌다.
일본은 조선의 기존 지배층 일부를 식민지 통치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에서 흔히 나타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외부 세력이 모든 지역과 주민을 직접 관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존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사람들을 통치 구조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역시 식민지 통치를 운영하면서 조선인 관료와 경찰, 지역 유지 등을 활용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행정기관에서 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의 행동이 같았다고 볼 수는 없다. 낮은 직급의 생계형 근무와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고위 관료, 독립운동가를 직접 탄압한 경찰의 행위는 각각 구체적인 사실을 토대로 평가해야 한다.
친일 문제를 연구할 때 직위와 활동 기간, 구체적인 행위, 일본 통치기관과의 관계, 그로 인해 받은 대가 등이 중요한 이유다.
1907년 이후 국권 침탈과 협력은 더 깊어졌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고종은 일본의 압력 속에 퇴위했다.
뒤이어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의 행정에도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같은 해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국가 기관은 점점 독자적인 기능을 잃어갔다.
한편으로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본에 맞서 싸웠고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반대편에서는 일본의 지배 확대에 협력하는 인사와 단체가 활동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회를 단순히 ‘나라가 빼앗기는 과정’이라고만 설명하면 당시 사람들의 다양한 선택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 중에는 무기를 들고 의병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고, 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우려 한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일본의 통치 체제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확보하려 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선택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점이 대한제국 말기의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1910년 한일병합과 대한제국의 소멸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등이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했다.
1910년 8월 29일 병합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고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정치와 행정, 경찰, 교육, 경제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식민지 통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부터 친일 협력의 모습도 크게 달라진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국권 침탈 과정에 협력하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이미 만들어진 식민지 통치체제 안에서 일본의 정책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형태가 확대되었다.
관료와 경찰뿐 아니라 경제계, 언론계, 교육계, 문화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일제가 전쟁을 확대하는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전쟁 동원과 황민화 정책에 협력한 행위가 중요한 역사적 쟁점으로 등장하게 된다.
‘친일’이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볼 때 필요한 기준
친일 문제는 지금도 논쟁이 많은 주제이기 때문에 역사 자료를 볼 때 몇 가지 기준을 세우면 이해하기 쉽다.
첫째는 시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개항기, 대한제국 말기, 1910년대, 1930~40년대의 상황은 서로 달랐다.
둘째는 구체적인 행위를 살펴봐야 한다.
일본과 교류했다는 사실과 국권 침탈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다.
셋째는 지위와 영향력을 함께 봐야 한다.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고위 관료와 생계를 위해 하급 업무를 맡은 사람의 책임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넷째는 대가와 지속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통치에 반복적으로 협력하면서 관직이나 경제적 이익, 사회적 지위를 얻었는지도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친일이라는 단어를 단순한 정치적 비난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행위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무리
친일 세력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개항 이후 일본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나타났고,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본격적으로 침해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세력이 점차 뚜렷해졌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로 고위 관료와 정치단체의 협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났으며, 1907년 이후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약화되는 과정과 1910년 한일병합에서도 이러한 협력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같은 시대에는 의병, 언론인, 교육운동가, 독립운동가처럼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하나의 이야기보다,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비교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1910년부터는 상황이 다시 달라진다. 대한제국이 사라지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식민지 통치가 제도화되기 때문이다. 토지조사사업과 헌병경찰제도, 학교 교육의 변화 등을 통해 일제의 통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기 시작한다.
다음 편에서는 바로 이 1910년대 일제강점기 초기의 식민지 통치가 평범한 사람들의 토지·학교·직업·일상생활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식민 통치 협력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FAQ
Q1. 친일파는 언제부터 생겼다고 볼 수 있나요?
정확히 한 해를 정해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직접 침해하기 시작한 1900년대, 특히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 일본의 국권 침탈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정치인과 단체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Q2. 개화파는 모두 친일파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의 근대적인 기술과 제도를 배우려 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협력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과 식민지 지배에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Q3. 일제강점기에 일본 기관에서 일한 사람은 모두 친일파인가요?
역사적으로는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직위와 활동 내용, 식민지 정책 결정이나 독립운동 탄압에 참여했는지, 경제적·정치적 대가를 받았는지 등 구체적인 사실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고위 정책 협력과 생계를 위한 하급 업무를 동일하게 평가해서는 당시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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