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말하던 사람이 왜 친일로 돌아섰을까, 1920~30년대 ‘변절’의 시대

 세부 주제: 문화통치에서 내선일체까지, 독립운동 경력자와 지식인 일부가 친일 협력으로 이동한 배경

한국 근현대사를 읽다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젊은 시절에는 독립을 이야기했고 민족계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나 일본의 식민 통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이다. 어떤 인물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찬양했고, 어떤 인물은 조선 청년에게 일본군 입대를 권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를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처음부터 친일적인 입장이었던 사람보다 이런 ‘변절’의 사례가 더 강한 논쟁을 일으키는 이유가 있다.

한때 식민지 현실을 비판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을 바꾼 것일까. 아니면 일제가 1920년대 이후 만들어 놓은 새로운 통치 방식 속에서 조금씩 협력의 길로 이동한 것일까.

이 시기를 살펴보면 친일 협력은 몇몇 유명 인사의 개인적인 선택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보인다. 3·1운동 이후 일본이 통치 방식을 바꾸면서 조선 사회의 엘리트와 유력 인사를 식민지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1930년대 전쟁이 확대되면서 그 협력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변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왜 통치 방식을 바꾸었을까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학생과 종교인, 상인, 농민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무력과 경찰만으로 조선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후 일제는 기존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일부 수정했다.

이 시기를 흔히 ‘문화통치’라고 부른다.

신문 발행이 일부 허용되고 조선인에게도 제한적인 사회 활동의 공간이 생겼다. 겉으로 보면 이전보다 자유가 확대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식민지배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통치 방식이 더욱 세밀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일본은 조선 사회의 유력한 사람들을 식민지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언론인과 지식인, 기업가, 지역 유지 등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총독부 정책에 협조하면 수많은 조선인을 직접 억압하는 것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강압만으로 움직이는 식민지에서 ‘조선인이 다른 조선인에게 식민지 정책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사회’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이 1920년대 친일 협력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친일은 ‘관직을 받은 사람’에서 ‘여론을 만드는 사람’으로 확대됐다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를 떠올리면 이완용 같은 고위 관료가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1920~30년대로 넘어가면 친일 협력의 모습도 달라진다.

정치 관료뿐 아니라 언론인, 문인, 교육자, 기업인, 종교인과 같은 사회 지도층 일부가 식민 통치와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영향력은 때로 관료보다 더 컸다.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는 지식인은 수많은 독자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었고 유명한 문인이나 교육자가 일본의 정책을 지지하면 식민 통치는 단순한 강압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처럼 포장될 수 있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총독부 정책에 협력하는 단체와 행사에 참여시키고 각종 위원이나 자문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친일 문제를 볼 때에는 일본 관리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사람만 찾으면 안 된다.

대중에게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이다”라고 설득한 사람도 식민 통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친일로 돌아선 사례도 있었다

이 시기를 특히 복잡하게 만드는 부분이 바로 ‘변절’이다.

실제로 초기에는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에 참여했지만 이후 일본에 협력한 인물들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이광수는 이러한 논쟁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1919년 2·8독립선언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고 민족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식민지 체제 안에서 활동하면서 점차 친일적인 입장을 보였고,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일본의 전쟁 동원과 황민화 정책을 지지하는 글과 활동에 참여했다.

최남선 역시 비슷한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이후 조선총독부의 역사 편찬 사업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했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 협력 행적으로 비판받았다.

이런 사례가 사람들에게 더욱 강한 배신감으로 남은 이유는 처음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지지했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때 독립이나 민족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이후 식민지 권력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왜 사람이 변하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하지만 역사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배신했다”라는 한 문장에 머무르기보다 어떤 과정에서 입장이 바뀌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왜 변절했을까

변절의 이유는 사람마다 달랐다.

첫 번째는 현실에 대한 좌절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해외 독립운동 역시 즉각적인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의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두 번째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익이었다.

총독부의 정책에 협력하면 관직이나 각종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고 사업이나 경제 활동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었다.

세 번째는 개인의 안전 문제였다.

독립운동에는 체포와 투옥, 고문, 재산상의 피해라는 위험이 따랐다. 오랫동안 탄압을 경험한 뒤 활동을 중단하거나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과 식민지배를 적극적으로 찬양한 것은 같은 행동이 아니다.

활동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아간 사람과 일본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다른 조선인에게 군대에 나갈 것을 공개적으로 권한 사람을 동일하게 평가하기 어렵다.

그래서 친일 문제에서는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함께 ‘결국 무엇을 했는가’를 반드시 함께 봐야 한다.

1920년대의 ‘문화통치’가 친일 엘리트를 키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1920년대 일제의 통치에는 회유와 분할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모든 조선인을 동일한 강도로 탄압하기보다 식민 통치에 협력하는 사람에게는 제한적인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언론과 교육, 경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일정 부분 열어주면서도 식민지배 자체를 위협하는 독립운동은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결과 조선인 사회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길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계속 독립운동을 했다.

누군가는 교육이나 경제 활동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우려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식민지 체제 안에서 출세하는 길을 선택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협력 엘리트’가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은 반드시 처음부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일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현실적인 타협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총독부와 관계가 깊어지고, 결국에는 식민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위치까지 이동한 사람도 있었다.

작은 타협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적극적 협력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 점은 변절의 역사를 이해할 때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람의 정치적 선택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뒤집히기보다 환경과 이익, 두려움과 자기합리화가 오랜 시간 겹쳐지면서 변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는 1920년대보다 1930년대 후반에 본격화됐다

여기서는 시기를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내선일체’라는 표현은 조선과 일본이 하나라는 의미를 내세운 식민 통치 구호인데,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 강하게 강조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조선인을 일본의 전쟁 체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원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식민지 조선인을 ‘통치해야 할 주민’으로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일본 제국의 전쟁을 위해 인력과 물자를 제공해야 하는 존재로 동원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황민화 정책이 강화됐다.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일본어 사용이 더욱 강조되었으며,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게 하는 정책도 시행되었다.

1939년에는 창씨개명과 관련된 제도가 마련되어 조선인의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압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따라서 1920년대 문화통치와 1930년대 후반 내선일체는 서로 단절된 정책이라기보다 하나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1920년대에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할 조선인 엘리트와 사회적 기반을 확대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이들을 포함한 사회 전체를 전쟁 동원 체제 속으로 더욱 강하게 끌어들인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친일 협력의 기준도 더욱 뚜렷해졌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친일 협력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사례가 훨씬 선명하게 나타난다.

일제는 중국과의 전쟁을 확대하고 이후 태평양전쟁까지 벌이면서 조선의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선인 지식인과 유명 인사들은 강연과 신문 기고, 단체 활동을 통해 일본의 전쟁을 지지했다.

조선 청년에게 군 입대를 권하는 글을 쓰거나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기도 했다.

여성에게 전쟁 지원을 요구하고 물자 헌납을 독려하는 활동에 참여한 사례도 있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단순히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졌거나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설명하고 사람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 친일 협력의 구체적인 ‘행위’를 중요하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변절했고, 누군가는 끝까지 거부했다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은 아니었다.

강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한 사람이 있었고 감옥과 망명 생활을 감수한 사람도 있었다.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워지자 만주와 중국 등지로 이동해 활동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 지식인은 일본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반면,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면서도 전쟁 선전에 참여하지 않거나 활동 자체를 중단한 사람도 있었다.

이 사실은 변절을 단순히 “시대가 어려웠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이 매우 강압적이었다는 사실과 개인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모든 협력이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지만 모든 협력이 강요된 것이었다고 설명하는 것도 역사적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 문제가 끝나지 않은 이유

1945년 일본이 패전하면서 식민지배는 끝났다.

하지만 친일 협력 문제는 동시에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행정과 경찰, 교육, 경제 분야에서 경험과 지위를 쌓은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에는 친일 협력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즉 반민특위가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과 수사 방해 등이 겹치면서 반민특위 활동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이 문제는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계속 논쟁거리로 남았다.

누가 친일 협력자였는지뿐 아니라 해방 이후 이들이 어떤 위치에서 활동했는지, 왜 충분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가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친일 논쟁은 단순히 100여 년 전의 인물 평가만을 둘러싼 문제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해방 이후 어떻게 이어졌는가라는 현대사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마무리

1920~30년대의 친일 문제를 살펴보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사람들의 선택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919년 이후 일제는 단순한 무력 통치에서 벗어나 조선 사회의 유력 인사를 회유하고 식민지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지식인과 사회 지도층은 식민 통치와 점차 가까워졌고, 과거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 경력이 있었던 사람 가운데에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인물이 나왔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향하면서 이러한 협력은 더욱 분명한 형태로 나타났다.

내선일체와 황민화라는 구호 아래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전쟁에 동원하려 했고, 일부 조선인 지식인과 유명 인사는 이를 대중에게 선전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결국 친일 문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에게 먼저 ‘친일파’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떤 위치에서, 어떤 행동을 했고 그것이 식민지배와 전쟁 동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는 것이다.

특히 한때 독립을 이야기했던 사람이 왜 정반대의 길로 이동했는지를 추적해 보면 식민지배가 단순히 외부의 폭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회유와 출세, 공포와 현실 타협, 그리고 협력자의 자기합리화까지 이용한 체제였다는 점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 흐름을 한 단계 더 구체화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황국신민화·창씨개명·지원병과 징병제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문인·언론인·종교인 등 사회 지도층의 친일 협력이 왜 이 시기에 급격하게 노골화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FAQ

Q1. 내선일체는 1920년대부터 시행된 정책인가요?

일본이 조선인을 동화시키려는 정책 자체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내선일체’가 대표적인 식민 통치 구호로 강하게 강조된 시기는 주로 1930년대 후반입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을 일본의 전쟁 체제에 동원하면서 내선일체와 황민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Q2.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친일 협력자로 변한 사례가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이광수와 최남선처럼 초기에는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과 관련된 활동을 했으나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나 전쟁 동원에 협력한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물들이 대표적으로 거론됩니다. 다만 인물을 평가할 때는 초기 활동과 후기 활동을 각각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Q3. 당시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은 모두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인가요?

그렇게 일괄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강압과 생계 문제 때문에 제한적으로 협력한 경우도 있었지만, 높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이익을 얻으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선전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협력의 정도, 자발성, 실제 행위와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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