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의 지도층은 왜 일본의 통치에 협력했을까

 세부 주제: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고위 관료·왕공족·정치 지도층의 친일 협력과 식민지 권력 편입 과정

한국 근현대사에서 친일 문제를 살펴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에 닿게 된다.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도층은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특히 대한제국 말기부터 1910년대 초반까지는 조선의 기존 지배층 일부가 일본의 식민 통치 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이 비교적 선명하게 나타난다. 고위 관료가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과 병합 과정에 협력했고, 일부 왕족과 귀족층은 병합 이후 일본 제국이 부여한 작위나 금전적 혜택을 받아들였다.

이 시기의 친일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유명 인물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누가 어떤 지위에 있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과 조약에 참여했으며, 그 결과 어떤 대가를 받았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을사늑약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고위 관료의 협력

대한제국 지도층의 친일 협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건은 1905년 을사늑약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대한제국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을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으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이 알려져 있으며 후대에는 이들을 이른바 ‘을사오적’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일본과 교류했다는 것이 아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고위 정책 결정권자로서 찬성하거나 협력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당시에도 이러한 행동은 큰 비판을 받았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처럼 언론에서 조약 체결에 참여한 대신들을 강하게 비판한 글이 등장했고, 일부 관료와 유생은 상소와 사퇴로 항의했다.

즉 이들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해방 이후 뒤늦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도 이미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이완용은 어떻게 식민지 권력의 핵심 인물이 되었을까

대한제국 말기의 친일 협력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가 특별히 주목되는 이유는 한 사건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주권이 단계적으로 약화되는 여러 과정에서 고위 관료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찬성한 대신 가운데 한 명이었고 이후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에 올랐다.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서도 대한제국 정부를 대표해 병합조약에 서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그의 행적은 대한제국 말기의 친일 협력이 어떻게 국가 최고위층까지 이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병합 이후 일본은 이완용에게 귀족 작위와 금전적 혜택을 제공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왜 이런 대우를 했는가이다.

식민 지배를 시작한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의 기존 고위층 가운데 일부를 새로운 통치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유리했다. 기존 지배층이 공개적으로 일본의 통치에 협력한다면 식민지배에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위 친일 관료에게 작위와 경제적 혜택을 주는 정책은 단순한 개인적 보상이 아니라 식민 통치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다.

‘경술국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유

1910년 한일병합 과정에 참여하거나 협력한 고위 관료 가운데 일부는 후대에 ‘경술국적’이라는 표현으로 불렸다.

‘경술’은 1910년의 간지이고, ‘국적’은 나라를 해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명칭 역시 당시 국권 상실 과정에 책임이 있다고 평가된 고위 인사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만 역사 글을 쓸 때에는 이런 명칭만 외우는 것보다 각 인물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결정에 참여했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과 군사권, 행정권을 단계적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최고위 관료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병합 과정에 협력한 것은 평범한 개인의 선택과는 영향력의 크기가 달랐다.

정책 결정권자의 선택은 국가 전체에 직접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도층의 친일 행적을 평가할 때는 개인의 사적인 일본 호감보다 공적 권한을 어떻게 사용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일본은 왜 조선의 귀족층을 끌어들였을까

1910년 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의 기존 지배층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왕족과 고위 관료, 양반층을 식민지 통치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그 대표적인 제도가 조선귀족 제도였다.

일본은 병합 이후 일부 조선인에게 후작, 백작, 자작, 남작과 같은 작위를 수여했다. 이는 일본의 귀족제도를 조선의 기존 상층부에 적용한 것이었다.

작위를 받은 사람 가운데에는 대한제국에서 고위 관료를 지냈거나 병합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한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은사금이라는 명목의 금전도 지급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두 가지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줄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조선인을 식민 통치의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전통 사회에서 오랫동안 권위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일본 제국의 새로운 질서에 들어오면 지역사회에도 상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일본은 이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지도층의 협력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크게 평가되는 이유

친일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논쟁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는 책임의 크기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생계를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거나 관청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한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고위 관료나 사회 지도층은 상황이 다르다.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거나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권을 넘기는 조약에 찬성한 대신과 단순히 일본 회사에서 월급을 받은 노동자의 행위를 같은 수준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도층이 일본의 통치에 협력하면 그것은 개인의 생존을 넘어 제도와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 지도층은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선택지와 정보,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사 연구에서도 친일 행위를 평가할 때 지위와 권한, 협력의 지속성, 실제 정책에 미친 영향 등을 중요하게 본다.

왕실과 친일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일제강점기의 지도층을 이야기할 때 대한제국 황실과 왕공족의 문제도 빠지기 어렵다.

병합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을 완전히 해체하기보다 일본 황실 체계 안의 ‘왕공족’으로 편입했다.

일부 왕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거나 일본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왕실 구성원의 행적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왕실은 병합 이후 상당 부분 일본의 관리와 감시를 받았고 정치적 자유도 제한되었다. 어떤 왕족은 일본 체제에 순응했고, 다른 인물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왕족 역시 신분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실제 행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반면 일본의 식민 통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일본 제국의 군사적·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라면 그 행위는 별도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도 친일 문제는 항상 ‘신분’보다 ‘행동’을 기준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친일 지도층은 식민 통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안정적인 통치 기반이었다.

조선 전체를 일본인 관리만으로 운영하기에는 인력도 부족했고 지역사회에 대한 정보도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기존 대한제국의 관료 경험자와 지역 유지, 귀족층 일부를 활용했다.

이들은 식민지 행정이나 각종 자문기구, 지역사회 조직 등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사회 내부의 영향력 있는 인물을 통해 정책을 전달하고 주민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런 구조는 1920년대 이후 더욱 발전한다.

초기에는 고위 관료와 귀족층을 활용하는 방식이 중심이었다면 이후에는 언론인, 교육자, 기업가, 종교인, 문인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자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즉 친일 협력의 중심이 ‘국가 고위 관료’에서 ‘사회 전체의 지도층’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변화가 이후 1930년대 친일 협력의 성격을 크게 바꾸게 된다.

처음부터 친일이었던 사람과 나중에 변절한 사람은 다르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지도층을 이해할 때 흥미로운 차이가 하나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대표적 친일 관료는 국권 침탈 과정에서 직접 일본에 협력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 1920~30년대로 가면 처음에는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이후 일본에 협력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이른바 ‘변절’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초기의 친일 관료가 국가의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면 후대의 친일 지식인은 일본의 식민 통치와 전쟁을 조선인에게 설명하고 선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둘 다 식민 통치와 연결된 행위였지만 성격은 조금 달랐다.

하나는 국가의 제도를 일본에 넘기는 과정에 가까웠고, 다른 하나는 이미 만들어진 식민 체제를 사회적으로 유지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에 가까웠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일제강점기의 친일 문제가 시기마다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친일 문제를 볼 때 꼭 구분해야 할 세 가지

역사 속 지도층의 친일 행적을 살펴볼 때에는 세 가지 기준을 구분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째는 ‘일본과 접촉했는가’가 아니라 ‘식민지배에 협력했는가’이다.

당시 일본 유학을 했거나 일본인과 교류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협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둘째는 실제 행위의 영향력이다.

국권을 넘기는 조약에 참여하거나 식민 통치 정책을 결정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일본 문화를 선호한 것은 전혀 다른 수준의 문제다.

셋째는 협력의 지속성과 대가다.

반복적으로 식민 통치에 참여하면서 관직이나 작위, 경제적 혜택을 얻었다면 역사적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세 가지 기준을 적용하면 친일 문제를 단순한 감정적 낙인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책임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마무리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친일 협력은 국가 지도층에서 먼저 뚜렷하게 나타났다.

을사늑약에 찬성한 고위 대신, 한일병합 과정에 참여한 관료, 병합 이후 일본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기존 지배층 일부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은 이들을 단순히 보상하기 위해 우대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식민지 통치체제 안으로 편입해 지배를 안정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는 1920년대 이후 더 넓은 형태로 변화한다.

고위 관료와 귀족뿐 아니라 언론인, 지식인, 교육자, 기업가와 같은 사회 지도층 일부까지 식민 통치의 협력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는 처음부터 일본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인물뿐 아니라 한때 독립이나 민족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꾼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친일 문제는 한 번에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확대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국권 침탈에 협력한 고위 관료가 중심이었다면, 1920년대에는 식민 사회의 유력층이 통치에 포섭되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일부 지식인과 사회 지도층이 내선일체와 황민화, 전쟁 동원까지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이 흐름을 따라가면 친일의 역사는 단순히 몇 명의 유명한 ‘매국노’를 외우는 문제가 아니라, 식민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현지의 지도층을 포섭하고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정치·사회사의 한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FAQ

Q1. 일제강점기 초기 친일 지도층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나 기존 지배층 가운데 일본의 국권 침탈과 한일병합 과정에 직접 협력하거나, 병합 이후 일본이 부여한 작위와 경제적 혜택을 받아 식민 통치체제에 편입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Q2. 이완용이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고 이후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과정에도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즉 대한제국의 외교권 상실부터 병합까지 국권이 단계적으로 약화되는 과정에서 고위 정책 결정자로 여러 차례 관여했습니다.

Q3. 일본의 작위를 받은 조선인은 모두 같은 수준의 친일 행위를 했나요?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작위를 받은 사실은 일본의 식민 통치체제에 편입되었다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 실제 역사적 평가는 병합 과정에 대한 참여 정도, 이후의 활동, 식민지 정책 협력 여부, 경제적·정치적 대가 등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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